2020년 10월 4일 일요일

[법과 생활] ‘사과’가 ‘법’을 대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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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생활] ‘사과’가 ‘법’을 대체할 수는 없다

김해원 / 변호사
김해원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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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발행 2020/10/05 미주판 21면 기사입력 2020/10/04 12:22

영화 ‘부당거래’에서 검사로 나오는 류승범의 명대사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상대방 기분 맞춰주다 보면 우리가 일 못한다고.”

노동법 상담을 해보면 법 대신 ‘정(情)’을 앞세우는 한인 고용주가 많다. 종업원의 기분을 위해 일종의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호의를 베푼 사례는 다양하다. 불필요한 식사 제공, 직원의 생일·경조사 챙기기, 규정에 없는 휴가 제공, 직원에게 돈 꿔주기, 임금 선불, 현금으로 임금 지불 등 고용주의 호의는 각양각색이다. 임신한 직원을 배려한다며 “집에 가서 쉬라”는 고용주도 있고 심지어 직원 자동차 구입에 코사인까지 해준다.

한인 고용주는 근무 중 다친 직원을 상해보험으로 처리하기보다 병문안부터 간다. 직원이 회사 물품, 공금 등을 훔쳐도 경찰 신고보다 사과를 받고 경고로 끝내는 경우가 있다. 가주 노동법에는 호의를 베풀라는 조항은 없다. 오히려 호의를 베풀었다가 고용주가 피해를 입는 경우가 더 많다.

호의가 계속되면 직원들은 어느 순간부터 이를 권리로 착각해 계속 요구만 하게 된다. 이런 호의를 한인 직원에게만 베풀면 더 문제다. 타인종 직원은 이를 인종 차별로 여긴다. 게다가 피해 직원 입장에서는 고용주가 가해자의 사과로 문제를 끝내고 처벌하지 않으면 나중에 회사를 상대로 소송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최근 논란이 됐던 뉴질랜드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발생한 외교관 K씨의 성추행 사건도 법대로만 처리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는 가해자의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다. 직장 내 규정과 법에 따른 명확한 사건 처리와 처벌을 원한다. 사건이 발생하면 즉각 성희롱 대응 매뉴얼대로 처리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시키는 조치를 해야 한다.

당시 주뉴질랜드 한국대사의 부인은 피해자 가족에게 위로 편지를 쓰면서 카카오톡 캐릭터인 카카오 프렌즈 인형을 선물했다. 법조계 시각으로 보면 황당한 발상이다. 피해자가 인형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4월 발생한 서울시청 남자직원의 성폭행 사건도 서울시는 오히려 가해자를 피해자와 업무 연관성이 있는 부서로 이동시켰다. 당시 서울시장은 피해자에게 ‘힘내라’는 취지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피해자는 위로가 필요한 게 아니다. 법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안은 몇 마디 말로 대신할 수는 없다.

최근 발생한 북한의 한국 공무원 사살 만행을 보자.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북한의 사과가 진정성을 가지려면 국민이 납득 할만한 수준의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단순히 사과로 끝낼 수 없다는 의미다.

반면, 한국 정부는 고작 북한 통일전선부가 보낸 사과 통지문 한 장에 만족하고 있다. 의아하다. 그동안 수십 년에 걸친 일본정부의 사과는 진정성이 없다고 했는데 북한의 사과 통지문에는 만족할만한 진정성이 있었는가. 의문 투성이의 통지문을 받아들고 좋아하는 한국 정부다.

이렇게 사과를 계속 받아들이면 가해자는 역시 권리인 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법을 사과로 대체하려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다. 법을 ‘정’이나 ‘사과’로 대체하면 국가가 가는 방향은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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